제목 :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저자 : 엄기호

출판사 : 따비

독서기간 : 2014.6.3 ~ 2014.6.5



1. 저자에 관하여


  울산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폭력적이고 부패한 교사를 만나 교육과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에 눈떴다. 전교협 해직교사들의 편지글 모음인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를 읽으며 다른 교육의 가능성을 갈망하게 되었다. 사회학과에 진학하였지만 학부 시절에는 거의 공부를 하지 않고 가톨릭 동아리 활동에 푹 빠져 있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고서야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곧 국제단체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국제가톨릭학생운동 아시아 태평양 사무국에 나갔다. 당시 한창 달아오른 반세계화 현장에 참가하며 주로 대학생들의 사회의식을 고양하는 양성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하자센터에서 글로벌학교 팀장을 하고 늦은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문화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 신자유주의와 청년 하위문화를 주로 연구하였다. 돌아보면 늘 교육의 언저리에서 살아온 셈이다.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의 페다고지를 만드는 것을 삶의 화두로 삼고 있다. 2013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현재는 덕성여대 겸임 교수, '교육공동체 벗'에서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을 하고 있다.



2. 인상 깊은 구절


1) p.6-p.7 책을 펼칠 때마다, 학교에 갈 때마다, 나는 가르친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 모르는 것을 앎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것, 그것은 참 매력적이었다. 세계가 거기 있었다. 누구 표현대로 풀빵을 싸고 있는 신문조각의 글조차도 맛있었다. 때로는 풀빵보다 더.

  더 알고 싶었다. 아마 그때 나는 내 앎의 바깥에 무질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질서가 있고 그 더 큰 질서가 더 아름답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요즘도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경이로움이 부끄러움보다 더 크다고 느낀 이 때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2) p.9-p.10 내가 생각하기에 교육이란 낯선 것, 새로운 것을 만나 경이로움을 느끼는 연속적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낯선 것/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이 두렵지 않고 설레야 한다. 그러나 지금 모두가 소진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낯선 것/새로운 것을 만나는 일은 피곤한 일이기만 하다. 피곤이 설렘을, 짜증이 경이로움을 대체했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교육을 통한 성장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교육의 공간임을 자임하는 학교에서는 무엇이 가능한가를 묻기 위해 만든 말이 '교육 불가능성'이었다.

3) p.10-p.11 여기서 교사의 딜레마가 만들어진다. 열심히 학생들을 만나고 새로운 수업을 시작하면 격려를 받는 것이 아니라 불온시된다. 학교에 분란을 일으킨다고 말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네가 그러고도 교사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4) p.20-p.21 중세시대까지 배움과 지식이 일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으며 그것을 통해 피지배계급을 무지에 몰아넣고 지배에 예속시켰다면, 근대의 출발은 곧 모든 이의 계몽을 의미했다. 남에게 예속되지 않는 존재, 그래서 다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존재, 이것이 근대적 개인의 이상이 아니던가.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계몽이었다. 그리고 이런 계몽의 전진기지가 학교였다.

5) p.23 서울의 한 중산층 학부모가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사교육이 없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사교육에 들어가는 돈은 천문학적이고 자신들에게도 부담이 되지만, 이 사교육이 없어지면 자기 자식이 시골에서 엉덩이 무겁게 공부만 하는 아이와 경쟁해야 하는데 그게 더 끔찍하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사교육이란, 공부는 잘하지만 재력이 안 되는 자기 자식의 경쟁자를 미리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교육과 학교는 서민이나 하층계급이 자기 자식을 통한 신분 상승을 꿈꿀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중산층 이상이 자신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라 할 수 있다. 

6) p.27 인간은 다름을 만나고 마주쳤을 때에만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인간은 다름/타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재간이 없는 존재이다.

7) p.39-p.40 입시교육은 교실을 두 그룹의 학생들로 나눴다. 첫 번째는 입시 경쟁에 뛰어든 학생들이다. 소위 말하는 '공부하는 애들'이다. 이들은 입시를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이 때문에 입시에 소용이 없거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과목은 전략적으로 수업을 듣지 않는다.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교사가 입시와 상관없는 방식으로 수업을 전개하거나 시험문제를 내면 항의하거나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예민하여 교사와의 관계도 도구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이런 경우 국영수를 제외한 선택과목이나 예체능 과목에서 수업 붕괴가 나타난다.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를 한다고 해서 교실 붕괴가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두 번째는 '공부하는 애들'의 반대편에 있는 학생들이다. 흔히 '널브러진 애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범위는 넓다. 여기에는 입시 자체에서 완전히 벗어난 학생들은 물론, 대학에 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은 학생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경쟁과 경쟁의 바깥에 한 걸음씩 비스듬히 걸쳐 있는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의 경우에는 수능을 포기한 학생에서부터 '때로는 공부하고 때로는 포기하는' 학생들까지 들어간다. 성적이 나오는 정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 학생들은 그저 학교에 수용되어 대체로 교육이나 교사들과는 무관하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8) p.57-p.58 교사가 스스로 망가진 이야기, 잘못했던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 역시 그 교사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널브러진 애들'일수록 교사는 늘 야단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냈다가는 또 야단이나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 움츠러들고 스스로를 잘 보여주지 않는다. 더구나 교사들이 하는 규범적인 이야기는 잘 와닿지도 않고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도 없다. 반면 교사가 자신이 잘못한 이야기나 실수 그리고 상처와 고통을 드러내면 학생들도 머릿속에 교사의 경험과 비슷한 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고 그걸 드러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9) p.60 입시에 맞춰서 딱 계산을 해보면 이 과목은 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어쩌면 교사와 학생이 공모해서 무너뜨린 거죠. "이 시간에는 자고, 수학, 영어, 과학 시간에는 열심히 들어."

10) p.62-p.63  학교에 학원이 보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학원에 학교가 보조로 있다. 그래서 학생들을 걱정하는 교사들은 학원에서 학생들이 얼마나 피곤할까를 계산하면서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학생들이 이미 지쳐 있으므로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1) p.63 학교에서 배운다는 생각은 오래전에 떠난 것 같아요. 누가 사교육을 잘 시켰나 시험해주는 것이 학교인 거죠.

12) p.67 전략적 수업 붕괴 상황에서 국영수가 아닌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공식적인 수업에서조차 교사로서 존재감을 상실했다는 데서 나온다.

13) p.79-p.80 최교사와 다른 교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런 학생들은 사교육을 많이 받으면서 학교 수업은 "우습고", 교사들의 수준은 "같잖고", 수업은 내신 때문에 받지만 "거추장스럽고 귀찮기만"한다. 또 이를 노골적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교사들이 자존심이 많이 상하지만, "서울대 갈 아이", "학교를 빛낼 아이"라서 학교 전체가 보호하기 때문에 교사들도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에 비주류인 학생들은 자기네들끼리 뭉치지 못한다. 대신 "이 아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이 아이가 따돌리면 같이 따돌리고" 동조한다. 장교사가 비주류라고 부르는 이 학생들은 전형적인 노바디들이다. 풀러는 "사회적 신분의 차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차별"을 '신분주의'라고 부른다. 이 신분주의에 의해 사람은 "투명인간"처럼 취급 받으면서 "모욕을 당하고, 괄시를 받으며, 착취와 무시에 시달"리는 노바디들과 "추종과 추앙의 대상"이 되는 섬바디로 나뉜다.

  풀러는 노바디와 섬바디를 나누는 중요한 요소는 인맥이라고 말한다. 섬바디들은 "아주 풍부한 인맥을 확보하고 있는 반면, 노바디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 인맥은 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의미에서 질적이다. 양으로만 따지면 노바디야말로 훨씬 많지만 이들의 인맥은 쓸모가 없다. 풀러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이 노바디로 분류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노바디임을 감추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뭉치기보다는 등을 돌린다. "신분 때문에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서로 남을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

14) p.82-p.83 학교폭력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학생들이 흔히 하는 변명이 장난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역으로 그들이 괴롭힘을 당한 사람의 입장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사태의 심각성은 오로지 그 사람의 입장에 서 있을 때에만 이해가 된다. 문제는 이 사회적 약자들은 역지사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감정이입을 할 이유가 없다. 이런 현상을 나는 공감/동감 능력의 상실로서의 감정적 단절이라고 부른다. 교실은, 모르는 존재를 만나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면서 타자가 되는 경험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름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단절의 공간이 되고 있다.

15) p.89 학생들의 삶에 틈이 없다. 학생들은 너무 바쁘고 지쳐 있다. 거의 모든 학생이 자기가 왜 여기에 와서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학교에 와야 할 내적인 동기가 없다. 하고 싶지도 않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으니 "그야말로 스트레스가 팍팍 차 있는 상황"이라고 신 교사는 말한다.

16) p.94 고3의 경우는 입시경쟁의 최정점에 서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하든 하지 않든 입시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까지 하지 않던 공부가 갑자기 잘될 리 없고 바닥을 헤매던 성적이 갑자기 수직상슬할 일도 없다. 이제 와서 공부해 봤자 될 턱이 없다는 사실은 본인들이 더 잘 안다. 공부를 안 하자니 불안하고 두렵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공부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또 자존심이 상한다. 이 탈출구 없는 폐쇄회로 속에서 학생들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류교사는 말한다. 이런 "괴물"들이 약한 타자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7) p.110 최근 학교 폭력 담론 이후 제기되고 있는 안전에 대한 강박은 노바디들에 대해서 학교를 그저 '육체적 생명'을 돌보는 공간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학생들의 생명을 정치적 생명에서 육체적 생명으로 완전히 축소하여 그들을 사회적, 정치적으로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고 있다. 학교는 그저 학생들의 육체적 생명을 돌보기만 하는 '수용소'가 된 것이다. 노바디인 학생들을 아무 목적 없이 가둬놓고 그저 죽지만 않으면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공간이 바로 학교다.

18) p.115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첫 번째 원인은 학생의 진로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갈등이 커질 때는 학생이 바라는 미래와 학부모가 바라는 미래가 다를 때이다.

19) p.117 학생을 이해하도록 부모를 설득할 때, 심한 경우에는 "이게 다 교사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교사'가 학생을 설득하기는 커녕 오히려 부화뇌동했다는 것이다. "당신이 내 아이 책임질거냐?"가 학생의 장래와 관련해서 교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말이다.

20) p.118 한편에서는 우리 아이는 천재라고 치켜세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강압적으로 자녀의 생활을 통제한다. "강남의 중산층 어머니들 사이에서는 외출할 때 컴퓨터의 전원 케이블을 뽑아가지고 나가는 것은 상식적인 방법"이라거나 "강남의 중산층 부모들이 자녀의 학원 스케줄에 맞추서 자가용으로 일일이 태워다주고 데려오는 이유는 ... 한편으로 자녀들이 친구들과 만나 시간을 허비할 것을 우려해서 그것을 해방하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학생과 학부모 사이의 갈등이 되며, 학생이 교사에게 이런 상황을 호소했을 때 교사들은 손 교사처럼 난처해진다.

21) p.120-p.121 한편 학부모는 두 가지 상황에서 교사로부터 큰 상처를 받는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식의 역량이 부정당하는 것이다.

  학부모와 교사가 갈등을 빚게 되는 또 하나의 상황은 교사의 말이 학부모의 양육이나 교육방식에 문제를 제기했을 때이다.

22) p.156 교사들의 바쁨은 교사의 진짜 업무가 무엇인지가 모호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23) p.158 오늘날 한국 교육의 부실과 황폐화의 중심 원인도 여기에 있다. 학교의 주체들에게 회의 시간을 배치하지 않은 노동 설계의 미스터리인 것이다. 교육은 고도의 협력 활동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노동과정이 결국 자발적으로 관료주의에 종속하게 되고, 노예교육에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

24) p.164-p.165 한국 교무실의 역사는 침묵의 역사였다. 군사독재 시절의 당시 교육법 75조는 "교사는 교장의 명에 따라 교육한다"고 명시했다. 학교가 때론 '교장의 왕국'으로 불리던 그 시대에, 교사들은 소신을 가지고 자기의 수업을 설계하는 것은 고사하고 교육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고 토론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침묵의 교단에 잠시 반전이 있었던 것이 87년 민주화 이후의 일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결성되고 난 후 얼마 동안은 교무회의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격렬하게 토론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관리자가 일방적으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토론 주제를 결정하면 '벌떡' 일어나서 마이크를 잡고 문제제기를 하는 교사가 있었다. 이른바 '벌떡 교사'다. '벌떡 교사'로 찍히면 관리자와의 관계는 고달파졌지만 다른 교사들로부터는 암묵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신 교사는 그때는 선악의 대립이 뚜렷했다고 말한다.

25) p.175-p.176  쿨메신저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학교에서 광장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전체 교무실'이 아고라와 같은 역할을 했다. 교장, 교감이 들으라고 일부러 그 앞에서 다른 교사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욕을 하기도 했다. 임교사는 이전에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동료 교사들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담임을 맡든 그렇지 않든, 어떤 업무분장을 담당하든,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쿨메신저를 통해 일대일로 업무가 전달되면서, 교사들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26) p.179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바로 체제 모순에 대한 전기적 해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기묘한 의견 일치가 이루어진다. 조 교사나 그를 사적으로 위로하던 교사 모두 "이러한 문제들은 반드시 개인적으로 맞서고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우만은 이것을 정치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즉 개인적으로 벌어진 "사적 문제들을 공적 현안으로 해석하는 소임을 짊어진 행위의 죽음"이다.

27) p.188 이렇게 하는 건 죄인 거에요. 이렇게 무력하고, 교사가 학생을 보는데 자극이 없다는 것은 사실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인 거죠. 교육이란 것이, 가르치고 배우는 이런 것은 다 집어치우더라도, 소통을 한다는 건 서로 자극을 주고 받는 거잖아요.

28) p.198 생활지도는 교사들에게 자신의 일도 아니고 "귀찮은 편"이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절충안을 빨리 찾는다. 문교사가 생각하기에는 생활지도야말로 학생들의 일상적 삶이 걸려 있기 때문에 더 중요하며 심도 깊게 토론해야 하는 문제임에도 현장에서는 그렇게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교사들의 편의가 학생들의 인권이나 안전보다 더 우선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여기에 다수가 교사들은 쉽게 동의해버린다.

29) p.211-p.212 수업공개를 장학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보통 장학을 의료행위에 비유를 하는데, 장학이 사실 진단이거든요. 이 교사에게 어떤 피드백이 필요하고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파악하는 진단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장학은 평가에요. 학생들에게 평가가 배제의 수단이듯이 교사들한테도 평가가 배제의 순간인 거죠.

30) p.219 책무가 강조되는 사회는 무책임한 사회다.

31) p.224 학생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지만, 학교는 학생들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책임을 지려는 교사들을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교에 누가 되거나 공연한 민폐를 끼친다고 불온시하고 있다.

32) p.244 교사에 대한 평가가 전면화되면서 교사들의 개성과 차이는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교되고 서열화되기 시작했다.

33) p.260 교사가 된 다음에 자신들이 바쁘게 일하고 열심히 노력할수록 역설적으로 얼마나 반교육적인 존재가 되는지에 대해 성찰하면서 교사로서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계속해서 의심하고 질문을 던짐으로써 학교의 반교육적 모습과 불화하며 교사로서 진정성을 추구했던 전교조 세대다. 그런데 그중의 한 명이었던 강 교사와 장 교사가 보기에, 지금의 젊은 세대는 학교라는 조직이 시키는 일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교육적인가, 혹시 이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 반교육적인 일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 없다.

34) p.276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최 교사뿐 아니라 많은 교사들이 이것이 바로 요즘 신규발령을 받은 교사들의 맹점이라고 말한다. 교사 자신이 규칙을 지키고 교사의 말을 잘 따르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학생을 이해하기보다는 '잘못된 것'이고 '고쳐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5) p.298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쌤, 하나도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할 때, 보통 가르치는 사람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이 새끼, 수업시간 내내 선생님이 말할 때 뭐 들었어? 듣기는 한 거야, 만 거야?"라고 혼을 낼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때 가르치는 이의 실패가 배우는 이의 실패로 전가되면서 동시에 '가르치는 이'가 스스로 그 위치를 포기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가르침의 실패를 들음의 실패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르치는 이가 아니라 '말하는 이'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3. 감상평


  우리나라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생긴 의견이었다. 이 의견에 어느 누구도 반기를 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 의견은 기본 전제가 되었다.

  하지만 교육에 왜 문제가 있는가, 문제가 어떻게 문제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성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내가 우리나라 교육 실태를 바꾸겠어!'라는 열망이 강했던 고3때에는 교육에 관한 책을 많이 읽긴 했다. 하지만 나는 고3이었고, 교육을 학생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데 그쳤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총체적 난국'에 대한 이해가 편협할 수밖에 없었고 편향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그 총체적 난국에 대한 총체적 해석본 정도가 될 수 있겠다. 학생의 입장에서, 교사의 입장에서, 학부모의 입장에서 우리나라 교육이 어떻게 붕괴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밝히고 있다. 슬프게도 읽다보면 계속 고개를 끄덕이게만 된다. 나는 교사들에게 혼나던 학생이었고, 때때로 괴물이기도 했다. 노바디가 아니라고 부인하기 위해 섬바디 사이를 배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나 뿐만 아니라 현재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 대부분이 겪고 있는 문제라니! 게다가 이 문제는 고쳐지지 않을 거 같아 더욱 가슴아프다.

  A.J.크로닌의 『성채』라는 소설은 문제는 개인에게 있는게 아니라 시스템에 있는 것이라고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곪아버린 부분이 너무 깊어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 지, 어떻게 고칠 수 있을 지 감이 잘 오지않는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래서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연대와 대화가 필요하다. 그렇게 새 '판'이 만들어지면 분명 고쳐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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