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이 소설의 화자인 이강민은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의 남성이다. 그는 차를 운전하다 '크랴샤'라는 단어가 써진 트럭을 발견한다. 그는 왠지 그 단어에 끌리게 된다.
마흔 일곱이 되던 해 취미로 마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새로운 마술을 연습하며 사람들에게 선보이곤 했다. 작은 마술쇼에서 그는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했고, 다시 나타나게 했으며, 어떤 것들은 찢었다가 다시 붙였다. 이 일들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마술은 이를 가능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술아카데미의 선생 장연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세계적인 마술사 하미레즈의 오프닝과 전체 기획을 자신이 맡았고, 그 팀을 꾸리려 하는데 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강민은 그 전화를 받고 가슴이 뛰었다. 진짜 마술사가 되는 일이고, 기껏 보조이겠지만 큰 무대에 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연창은 마술쇼의 전체적인 구상을 하고 있었고 같은 팀의 마술사 3명은 그를 돕기만 하면 되었다. 이강민은 그 팀의 가장 어린 마술사인 다빈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길거리에서 마술을 하는 '버스킹'을 하러 간다. 관객의 눈을 어지럽게 하는 재주가 있던 다빈은 두 시간의 버스킹 끝에 오만원을 벌었다. 그들은 그 돈으로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진다.
많이 취한 다빈을 그의 동네로 바래다 준 강민은 동네의 모습이 다 보이는 공원에서 도시를 바라본다. 술에서 깬 다빈은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자유의 여신상을 사라지게 했듯 자신은 도시를 한 번에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하고 싶다고 한다. 저기에서 사는 사람들은 엄청 행복할텐데 자신과 비교되기 때문이었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마술이 아니라 그냥 사라지는 마술.
다음날, 놀랍게도 장연창이 강민과 다빈에게 프로젝트를 맡겼는데, 건물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마술이었다. 현장 답사를 가서 그 운조빌딩을 사진으로 찍어보냈다. 그리고 그날 찍은 사진은 이틀 동안 직업 일 때문에 바빠 열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인 폐목재를 활용한 재활용 가구에 관한 일이었다. 다빈이 사진을 빨리 보내달라 재촉해서 사진과 함께 떠오른 아이디어와 자신이 본 건물 변형 퍼포먼스 동영상 링크를 보냈다. 반응이 좋아서 운조빌딩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에 그 기법을 쓰기로 한다.
마지막 리허설에 이강민은 운조빌딩으로 간다. 그곳은 흰 천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운도빌딩이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을 미리 부숴놓은 다음 이미 건물이 있었던 것처럼 꾸며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기획했기 때문이었다.
이강민은 마술쇼를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다. 마술쇼는 성공리에 진행되었고, 특히 마지막 하이라이트의 건물이 사라지는 마술에서는 관객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 해에는 오래된 다리 하나가 무너져 시민 두 명이 다쳤고, 여름엔 대규모 철거사업이 있었고, 가을엔 운조빌딩이 사라지는 마술이 있었고, 겨울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소멸된 것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크랴샤의 뜻은 한참 뒤에 알게 되었는데, 모든 걸 잘게 부수는 기계의 이름인 'Crucher'의 발음을 옮겨 적은 것이였다.
2. 분석
작은 마술쇼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했고, 다시 나타나게 했으며, 어떤 것들은 찢었다가 다시 붙였다.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으며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안다. 관객들은 알면서도 매번 속아준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이 나를 사로잡았다.
마술은 마법이 아니다. 소멸된 것들을 되살릴 수 없는 것이 마술의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술은 눈속임을 통해 관객들에게 재미를 준다. 마술은 철저히 현실적이다.
"저는 저 도시가 사라지는 마술을 할 거에요."
"왜 사라지게 해?"
"어릴 때부터 맨날 여기서 놀았거든요. 여기서 저 불빛 보면서 무슨 생각했는 줄 알아요? 저 새끼들은 존나 행복할 텐데, 나 혼자 이러고 있구나. 씨발, 나는 맨날 얻어터지기만 하는데, 저 새끼들은 불 켜놓고 신나게 노는구나. 한꺼번에 불이 확 꺼지고 저 새끼들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 때부터 마술사가 되고 싶었어요. 한순간에 스르륵, 도시가 연기처럼 날아가버리는 거에요. 마술은 여기 가로등 아래에서 할 거에요. 이 앵글 죽이죠? 여기서 제가 손바닥으로 도시를 가리고 하늘을 한 번 가리켰다가 다시 도시를 보면, 모두 확 사라지는 거에요. 죽이죠?"
"죽이네."
"아저씨는 사람 참 힘 빠지게 대답해요."
"그런가? 그런데 도시 사라지게 했다가 어떻게 다시 나타나게 할 건데?"
"그게 카퍼필드와 저의 차이죠. 제 마술에서 도시는 그냥 사라지는 거에요."
"불가능한 마술이네."
다빈에게 '저 도시'는 증오의 대상이다.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훨씬 행복해보이는 그곳을 보며 '저 도시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빈이 바라는 것은 마술이 아니라 붕괴이다. 그것은 강민의 말대로 '불가능한 마술'이다.
다빈이 데이비드 카터필드와 자신의 차이점을 말한 것도 이 차이이다. 그는 마술을 하는 사람이고, 다빈은 붕괴를 꿈꾸는 사람이다. 불가능을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 대신 불가능한 일을 꿈꾼다.
폐목재를 다시 쓸 만한 재목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접착제와 불필요한 성분 등을 걷어내는 복잡한 공정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원가가 오를 수밖에 없다. 일반 가구보다 비싼 돈을 지불하는 대신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시간이다. 재활용 가구를 통해 나무가 지내온 시간을 살 수 있고, 지구가 좀더 오래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강민이 하는 일은 다빈의 꿈과 반대되는 속성의 일이다. 그는 새 가구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잘라내는 대신 기존 가구를 쓸만한 재목으로 만들어 재생산한다. 그에게 마술은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어째서 사건들은 번호표를 받아 대기하지 않고 한꺼번에 빚쟁이처럼 몰려드는 것일까. 어째서 모든 중요한 일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생각해보곤 했다. 왜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내가 치과에 가서 비싼 치료비를 내게 되는 것일까. 왜 하필 처가에서 부도를 맞은 달에 가게 주인은 세를 올려 달라는 전화를 하는 것일까. 동시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에 시달리느라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면 하느님께서 고난의 묶음 판매에 재미를 붙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낱개로 고난을 던져줄 때보다 묶음으로 고난을 던져줄 때 고난의 효과가 커진다. 낱개의 고난을 여러 번 겪는 것보다 원 플러스 원 고난을 한번 겪고 나면 저절로 하느님을 찾게 되니까.
강민이 생각하는 고난은 마치 묶음 판매처럼 한꺼번에 다가오는 무엇이다. 그리고 그 고난은 무언가의 부재로부터 다가온다. 돈의 부재, 건강의 부재, 사람의 부재 말이다. 이 부재는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부재한 채' 남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강민에게 어쩌면 마술은 그 부재를 잊게하는 도피처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마술의 세계에서는 없어졌다가도 어느 순간 짠! 하고 등장하곤 하니까.
그 자리에 있던 건물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없앤 다음 있는 것처럼 꾸몄다가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 펼쳐질 것이었다. 그것은 마술일까. 마술이라고 해야 할까. 마술이다. 분명히 마술이다. 마술이지만, 나는 그걸 마술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으며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일 수 없다.
강민은 이성적으로 그것이 마술임을 인정하나 가슴으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운조빌딩의 외벽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빌딩을 허문다는 것은, 다시 그 외벽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크랴샤. 나는 그 시절을 회상할 때 단 하나의 단어로 모든걸 되살린다. 크랴샤. 그 단어의 의미는 한참 후에 알았다. 영어 단어 'Crucher'의 발음을 옮겨 적은 것이였고, 모든걸 잘게 부수는 기계의 이름이었다.
나도 가끔 환각을 본다. 쉰이 넘은 다음 급격히 나빠진 시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있었다가 없었던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어머니가 문득 나타날 때도 있다. 말을 걸 뻔한 적도 있다.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말이 목에 걸렸다가 다시 들어간다. 운전하다가 문득 강을 쳐다보는데 사라진 다리가 눈에 나타나기도 한다. 운조빌딩을 지나갈 때도 그랬다. 그 자리에는 이미 거대한 쇼핑몰이 들어섰는데, 나는 가끔 운조빌딩이 보인다. 바깥으로 쑥 튀어나온 책상 같던 운조빌딩이 나타난다. 고개를 젓고 눈을 깜빡여본다. 환각은 금방 사라진다. 동그란 가로등 불빛이 수십 개 눈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눈이 침침하다. 도시는 절대 낡지 않는다. 나만 낡아갈 뿐이다.
가끔 환각을 본다고 한다. 이 환각은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있었던 것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다. 그가 마술을 동경했던 까닭은 부재했다가 다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술은 운조빌딩 마술과 함께 붕괴되었다. 그가 그것을 마술이라고 보았던 이유는 사람들을 눈속임을 통해 즐겁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그것을 마술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것은 부재했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영원히, 부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마술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일이다. 그가 생각한 불가능한 일들 - 죽은 어머니가 돌아온다던지 - 은 마술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분명히 불타올랐던 카드가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없었던 비둘기가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운조빌딩 마술과 함께 그 마술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여전히 마술을 동경한다. 없었던 다리가 눈에 나타나고, 책상 같던 운조빌딩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은 운조빌딩이 사라지는 마술에 열광하기에, 도시는 낡지 않고 자신이 낡아갈 뿐이라고 스스로 조소한다.
'글상자 > 소설분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편소설분석] 4. 유리의 도시 - 김중혁 (0) | 2013.02.02 |
---|---|
[단편소설분석] 3. 목걸이 - 귀 드 모파상 (0) | 2013.02.01 |
[단편소설분석] 2.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 박민규 (0) | 2013.01.31 |
[단편소설분석] 1. 중국행 화물선 - 무라카미 하루키 (0) | 2013.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