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수


주유소에선 시간당 천오백원을, 편의점에선 천원을 받았으므로 나는 늘 불만이 가득했다. 그게 그러니까, 시작 때완 달리 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편의점의 사장은 이러면서 세상을 배운다 - 라고 말했지만, 이천원씩 받고 배우면 어디가 덧나나? 뭐야, 그럼 당신 자식에겐 왜 팍팍 주는데?를 떠나서 - 못해도 이천원 정도의 일은 하고 있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글쎄 천원이라니. 덥기만 덥고, 짜디짠 지구.


나는 카프리썬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냈다. 제 돈으로 사는 거에요. 웃으며 말은 했지만 알고나 드세요, 제 인생의 이십오 분이랍니다. 시계를 쳐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지금 일하는 덴 사장이 꼴통이라서 말야... 오늘도 여자애 허벅질 만졌지 뭐냐... 나 참... 그래도 되는 거냐? 되고 말고를 떠나, 허벅질 만진다면 시간당 만원을 줘야 되는 게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만지는 게 나쁜 게 아니다. 그리고 고작, 천원을 주는 게 나쁜 짓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주인공의 산수란 이렇다. 그는 시간당 천원을 받든 천오백원을 받든 간에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위치이다. 어떻게 보면 수동적 존재이다. 여자애 허벅지를 만진 사장에 대한 평에도 이 산수가 적용된다. 도덕적 관념을 제하고 일의 난이도에 따라 시급이 매겨진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 남들의 말이 나누어지지 않고 나열된다. 때문에 문장이 자유롭게 구사된다. 박민규 특유의 문체에 힘입어 이 효과는 배가된다.

 

 

삼천원이요? 앞뒤 잴 것도 없이, 시간당 삼천원이란 말에 귀가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내 주변에 그런 고부가가치 산업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제의를 받은 사실만으로도, 갑자기 확, 고도산업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느낌이었다. 좋구말구요. 비하자면 수성과 금성과 지구를 지나, 비로소 화성에 다다른 태양광선이 바로 나같은 기분일까? 있으나마나에 받으나마나, 지구여 안녕.

 

그런 이유로, 나는 푸시맨이 되었다.

 

 

그의 지구는 1000원에서 1500원이 한 시간의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곳이었다. 그런 그에게 시급 3000원 제의는 화성과 다름없는 파격제의였다.

 

 

미안하구나.

 

아버진 그렇게 얘기했다. 또 그소리. 내가 일만 한다 하면 늘 같은 소리였다. 처음엔 들을 만했는데, 결국 들으나마나가 돼버린 지 오래다. 나이 마흔다섯에 시간당 삼천오백원, 즉 그것이 아버지의 산수였다.

 

 

이쯤되면 주인공이 말하는 산수가 시급과 비슷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주인공에게 카프리썬은 25분이듯, 산수는 물건과 시간의 환율이다.

 

 

넉넉한 환경은 아니어도, 제법 메탈리카 같은 걸 듣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세상은 뭔가 ESP 플라잉브이(메탈리카가 사용한 기타의 모델명)와 같은 게 아닐까, 막연한 생각을 나는 했었다. 했는데, 해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꼬박꼬박 도시락만 먹어온 얼굴의 아버지가 가냘픈 표정으로 사무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원래 좀 노는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 나는 조용한 소년이 되어버렸다. 뭐랄까, 그때는 몰랐지만 그 순간 마음속에 <나의 산수>와 같은 게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가냘픈 표정의 아버지처럼 아들도 조용한 소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나의 산수> 같은 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ESP 플라잉브이보다는 조촐한 도시락쪽이 더 가까웠다.

 

주인공은 그의 산수가 생겼다는 사실을 꽤나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어울리던 친구들이 안쓰럽단 투로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이들도, 같은 산수를 할 수밖에 없단 사실을.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학 같은 학문에 매진하는 삶을 살기 보다는 수학의 잔재인 돈에 치여서 살기 마련이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정신 차려. 열차가 출발하자 코치 형이 다가와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네. 심호흡을 크게 했지만 다리가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화물이나, 뭐 그런 걸로 생각하란 말이야.

 

 

마치 카프리썬이 그의 25분으로 환전된 것처럼, 푸시맨은 사람을 화물처럼 여겨야 했다. 전철은 신체의 안전과 삶의 안전을 등가교환하는 산수가 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철 밖에서 '사람'이었던 이들은 안전선을 넘어서면서 화물이 된다. 자신의 모습을 남은 공간에 맞추어 구겨가면서 어디론가 이동해야 한다. 삶의 안전을 위해서다.

 

 

어쩌면 피라미드의 건설 비결도 <억울함>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관두면 너무 억울해. 아마도 노예들의 산수란, 보다 그런 것이었겠지.

 

 

푸시맨 일을 하면서 노예와 자신을 동일시 여기는 주인공의 모습.

 

 

파아, 하아. 그리고 여전히 열차가 들어오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압력에 의해 튕겨나왔는데, 그런가 했는데

 

아버지였다.

 

파아, 하아. 어색한 표정으로 아버지는 어색해진 넥타이를 고쳐매고 서 계셨다. 그리고 잠깐, 넥타이를 맬 만큼의 짧은 시간이 그러나 절대 풀리지 않을 매듭으로, 우리 둘 사이를 엮으며 지나갔다.

 

그러나 눈을 못 마주치는 우리의 결계를 넘어, 또 다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쳇바퀴를 돌듯, 지구가 자전하듯 일상은 상습적으로 돌아온다. 삶의 안전을 위해서 우리는 그 거대한 쳇바퀴 - 전철로 들어가야만 한다.

 

 

세상은 하나의 열차다. 한 량의 정원은 180명, 그러나 실은 400명이 타야만 한다.

 

 

우리들의 산수가 초라해보이는 이유이다. 정원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한 열차를 타야하는, 그러니까 수요와 공급이 전혀 균등하지 않은 탓에, 우리의 삶은 휘청거린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신체를 전철 안에 조금 구겨넣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때로 새벽의 전철에 지친 몸을 실으면, 그래서 나는 저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몸을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밀지마, 그만 밀라니까.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 왜 세상엔 <푸시맨>만 있고 <풀맨>이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왜, 이 열차는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가.

 

 

열차는 곧 삶이고 세상이다.

 

 

여전히 구름은 흘러가고 지구는 돌고,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건너편 플랫폼의 지붕 부근에 떠 있는 이상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설마

 

기린이 아닌가.  그것은 정말 한 마리의 기린이였다. 기린은 단정한 차림새의 양복을 입고, 플랫폼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본드를 했더니 환각이 보였다던 코치처럼, 주인공 역시 아버지와 기린의 모습을 착각한다. 과연 그가 본 것은 환각이었을까? 만약 환각이었다면 그가 복용한 환각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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