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짝사랑
“인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이 뭔지 아십니까?”
“뭐?”
제레인트는 엄숙하게 말했다.
“짝사랑이지요.”
윽.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뭔지 아십니까?”
“난, 난…”
“상사병이올시다.”
도저히 못 참겠다. 난 맹렬하게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돌렸다. 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는 동안에도 제레인트는 계속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짝사랑과 상사병은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프고 아프지요. 참 글러 먹은 문제입니다. 짝사랑을 하면 그냥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면 될 문제인데 말입니다. 상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꼭 그것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해야 된단 말입니다. 상대도 날 봐주었으면, 날 생각해주었으면, 날 사랑해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고장이 나버리지요. 고약하다면 고약한 것이고, 동정하려고 들면 정말 동정받을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이영도, 『드래곤라자』中
#2. 스무 살
결국 난 대학생이 되었고,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오랫동안 감내하며 맡겨두었던 자유는 일시불로 지급되었다. 수업을 가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밤새워 노는 것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실컷 놀았다. 불을 발견한 최초의 인류가 된 기분이었다. 행복에 대해 알게 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너를 만난 이후의 내 삶은 설렘의 연속이었다.
너는 언제든, 어디에서든 존재했다. 밥 먹을 때, 수업 들을 때, 자기 전에 넌 불쑥불쑥 나타났다. 이토록 아름답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너를 세상이 가만두지 않을 텐데, 어떡하지? 네 모습은 삶의 순간마다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사랑이 잘될 리가.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네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졌다. 내가 지금 숨을 어떻게 내쉬고 들이쉬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스무 살의 가을, 너는 내게 물었다. 꿈이 뭐냐고. 좋아, 이번에 점수를 따야지. 난 당연히 이 질문에 수월하게 대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난 꿈으로 가득한 사람이니까.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이니까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지. 그런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3때까지 치열하게 꿈과 진로에 고민하던 나는 온데간데 없었다. 왠 멍청이 하나가 카페에 앉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했다.
집으로 돌아가 고등학생 때의 기록들을 찾아보았다. 대학생이 되면 하고 싶었던 온갖 일들이 그곳에 있었다. 꿈에 대한 생각도.
네 덕분에 나는 궤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스물한 살,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열정대학이라는 학교였다.
#3. 스물 여섯 살
돌이켜보면,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너를 좋아하는 나의 모습에 취해 있었다.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첫눈, 첫 등교, 첫사랑, 첫 키스. 이제 더 이상 처음에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소중한 순간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과거에 머물러 현재를 그르치지 말 것.
'글상자 > 끄적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9. 대체될 수 없는 (0) | 2017.02.22 |
---|---|
#28. 필통 (0) | 2017.02.21 |
#26. 꽃들아, 네 마음대로 펴라 (0) | 2017.02.19 |
#25. 열 한 밤 (0) | 2017.02.18 |
#24. 제주 여행 (0) | 2017.02.17 |
,